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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분을 주며 소멸한다

권정생 할아버지

Von der Quelle bis heute 2011. 1. 25. 21:13

 






작은 사람, 권정생


                     임길택
 

어느 고을 조그마한 마을에
한 사람 살고 있네.
지붕이 낮아
새들조차도 지나치고야 마는 집에
목소리 작은 사람 하나
살고 있네.

 

이 다음에 다시
토끼며 소며 민들레 들
모두 만나 볼 수 있을까
어머니도 어느 모퉁이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 잠결에 해 보다가
생쥐에게 들키기도 하건만
변명을 안 해도 이해해 주는 동무라
맘이 놓이네.

 

장마가 져야 물소리 생겨나는
마른 개울 옆을 끼고
그 개울 너머 빌뱅이 언덕
해묵은 무덤들 누워 있듯이
숨소리 낮게 쉬며쉬며
한 사람이 살고 있네.

 

온몸에 차오르는 열 어쩌지 못해
물그릇 하나 옆에 두고
몇며칠 혼자 누워 있을 적
한밤중 놀러 왔던 달님
소리 없이 그냥 가다는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그러나 몸 가누어야지
몸 가누어
온누리 남북 아이들
서로 만나는 발자국 소리 들어야지
서로 나누는 이야기 소리 들어야지.

 

이 조그마한 꿈 하나로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기고
쉰 넘기고
예순 마저 훌쩍 건너온 사람.

 

바람 소리 자고 난 뒤에
더 큰 바람 소리 듣고
불 꺼진 잿더미에서
따뜻이 불을 쬐는 사람.

 

눈물이 되어 버린 사람
울림이 되어 버린 사람.

 

어느 사이
그이 사는 좁은 창 틈으로
세상의 슬픔들 가만히 스며들어
꽃이 되네.

 

꽃이 되어
그이 곁에 눕네.

 

▣(《우리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제 27호, 1997.10)


이렇게 작은 글씨로 적어야 겨우 작가와 권정생 선생님의 마음을 그릴 것만 같다
권정생. 그 분의 곁에서 그 분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쓴 시.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몸은 할아버지였어도 영혼은 아이들의 것처럼 맑디 고운 분.
커다란 파도가 나를 휩쓸고 지난 간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차마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을 비교조차 할 수 없어 부끄럽지조차 않다.
올 초 우리아빠가 소개해주셔서 접하게 된 이 분의 책들.
국민학교 4학년 무렵이었나, 학교 도서관 책장에서 '몽실언니'를 울면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던 기억은 있지만
어려서 스토리가 궁금했던 탓에 글쓴이의 머릿말을 넘겨버렸었나보다.
20년 남짓 지난 지금에 다시 만난 권정생 선생님의 책들은
성경말씀 일부분을 좀 더 소박하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글들로 번역해 놓은 듯 하다.
내 삶에서 예수님과 이 분의 엿모습이 얼핏얼핏 연하게 자욱지었으면 하고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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