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line

벌써 7월이 열흘 가까이 흘렀네.

Von der Quelle bis heute 2012. 7. 9. 19:35

 

 

 

동생 집을 작업실 삼아 지내려고 했다.

막상 정리를 해 두니, 그림을 그리려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물감을 널어두는 게 걸릴 정도로 단정한 이 분위기 좋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과 어깨는 계속 아프지만, 병원은 가기가 싫다. 이유는 뜨거운 물리치료가 꺼려지기도 하고, 뙤악볕에 병원까지 가는 길도 엄두가 안난다고 이야기하는 _ 게으름에 있다. ㅎㅎ

Vladimir Gorbach가 연주한 Piazzolla가 나를 산뜻하게 쓰다듬은 이 시간.

주부로써의 저녁을 준비하는 내가 아닌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 어떤 정체성이 흐믓하다.

읽을 책으로는 김진 선생님의 마음의 구리거울과 나우웬의 아담.

소설도 한 권 있었으면 좋을 듯. 쿤데라의 농담과 같은 쓸쓸한 소설도 좋고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돈키호테도 좋겠다.

 

나는 내 안의 무거운 고민을 들춰볼 엄두도 못내고 있다.

교회와 개인 신앙과의 필연성이 해결되지 않고, 목회자의 권위나 다른 사람들과  미완의 자신을 어떻게 만나게 해야하는지.

지금은 정말 홀로 하나님과 만나야 하는 시기인지, 이대로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는게 하나님의 시선에서 기쁘신건지.

교회출석과 개인 신앙의 문제는 엄밀히 내 지인들에 대해 국한된 고민이다. 그 이상은 그 다음에.

교회출석이 지인들의 인생길에 울타리가 되어줄 최소한의 장치이지 않을까. 아직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의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본질적인) 습관을 가지지 못한 지인들에게 교회출석이 스스로를 돌아볼 일기장 역할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그 이상의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된 부분은 내가 감히 말하기 두려운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그래서 내가 미칠 영향이 벌벌 떨릴 정도로 두렵다. 완곡한 표현으로 미완이지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자꾸 누나,언니 역할을 하려고 한다. 내 마음 속에는 친구로 명칭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생인가보다. 타인의 불완전함이 나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없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만 그런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나우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도 나와 여러가지 연약함을 공유한 아름다운 인간일 뿐이다.

회심 직후 하나님과 만남의 기쁨에 빠져있을 때 내 상태로 그들을 끌고 오고 싶었다. 내가 누리는 기쁨과 기쁨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알리고, 살게 하고 싶었다. 어쩌면 가장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상태만 주장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 지금은 하나님과 그들을 친밀하게 도와줄 헬퍼 역할도, 그들로 깊숙히 들어가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게 지금에 맞는 진단일 것 같다. 그래, 내 고민의 골자는 내가 어떻게 조속히 성숙할 것이냐와 타인과 하나님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내 유익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사랑할 것이냐.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정말 괴롭다.

내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어떻게 인정받는지, 내 마음이 어떻게 고통받지 않을지, 이 주체할 수 없는 동정심을 해결할 힘이 없는건지, 어떻게 배려해줘서 타인을 만족시킬지...

인생에서 청중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여긴 선배들처럼

자유롭고도 진지하고 상처받지만 상처받지 않고, 사랑때문에 목숨까지 내어놓고,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