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4장 1-20
아주 오래 전 모세가 하나님께 처음 율법을 받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규례를 남겨주셨다.
그 사람의 피부병이 나았다고 제사장이 판단되면, 새 두마리 중 한 마리를 잡아서 생수가 담긴 오지그릇에 담아두고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와 살아있는 나머지 새 한 마리를 가져다가 생수가 섞인 죽은 새의 피에 찍어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그 사람의 피부병으로부터 정해졌다고 선언하고 살아있는 새는 들판으로 날려보낸다...(이후 생략)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 이전의 전통으로 이해한다.
만약 지금 어디선가 목사나 신부가 피부병에 걸린 환자에게 이런 형식을 취한다면 그들의 신학에 대한 의심을 받을 것이고 강한 거부감을 받을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들처럼, 우리들의 시대는 이러한 정결의식없이 피부병이 낫을 수 있도록 발전해왔고, 의학의 발전은 하나님의 은총과도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행해졌던 저 정결의식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것들에 대해 단정을 하려는 습관이 있다. 나는 이것을 병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나에게도 있는 습관이고 병인데, 내 사고력이 부족해서 내 기반지식이 부족해서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가?
(그렇다고 이러한 노동이 가치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고하지 않는 종교인들의 세뇌 형태는 사이비로 전락되기 쉽다고 시니컬하게 생각한다.)
또한, 표면적인 순종을 이유로 현실적인 이해없이 무리하게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고 의문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적나라한 예를 들자면, 땅 밟기 같은.
알 수 없지만 순종해야할 영역으로,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칙으로 묵묵히 받아들여야할 영역이 현재에도 왜 없을까?
인간의 철학으로 인간의 어떤 지혜로도 하나님의 가장 미련한 것에 닿을 수 없다는 말씀이, 실존적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에게 전제되어야 할 명령임을 먼저 가슴에 서늘하게 품어야 한다.
오늘은 나의 미련한 언어로 잘 설명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필요한 만큼의 지혜를 구하는 성실함으로 하루를 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고개를 숙인다.